읽는데 7 분 정도 걸려요
2020년 9월 16일 오전 3:08에 작성됨.

( 이 글은 기글하드웨어에 적었던 글을 옮겨 온 글입니다. )

저번에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언급한 대로 20만원으로 세일한 김에 WH-L600을 샀습니다. 물건이 오는 건 7월 말쯤에 왔는데 환경 구축하는 것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우선 이 헤드폰은 세 개의 입력을 받습니다. 하나는 HDMI ARC이고, 다른 하나는 광단자로 전달되는 S/PDIF고, 다른 하나는 아날로그 스테레오 입력입니다. 여기서 주로 쓰라고 만들어놓은 건 HDMI ARC입니다. 이 헤드폰은 기존의 홈시어터 보유자가 여러 사정으로 인해 볼륨을 땡기지 못할 상황에 대신 쓰라고 만든 물건이니까요. 대충 홈시어터 시스템이 구축된 TV의 ARC가 되는 HDMI 단자에 꼽으면 연결이 됩니다. 다만 요즘 나오는 eARC와는 달리 대역폭이 딸리기 때문에 지원되는 포맷은 S/PDIF와 별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ARC가 지원되는 TV가 없으니 이 단자는 쓸 수 없겠네요.

또 다른 점으로는 일반 HDMI 단자에 연결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점인데, 당연히 인식도 안 되고 소리도 안 납니다. HDMI는 영상을 전송하고 음성은 부차적으로 전송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기본 조건으로 영상이 넘어가야 합니다. 좀 고오오오오급 블루레이 플레이어들에는 음성만 넘기는 HDMI단자가 있습니다만 그것도 더미 영상을 끼워보내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아무튼 HDMI 연결은 안 된 다는 것이 전제조건입니다. 일본에 출시된 이것보다 상위(지만 더 구형인) 제품인 HW700ds는 HDMI 입력을 받는 AV 리시버를 내장한 듯한 제품이지만 그건 아예 이야기가 다르고요.

다음 단자는 광단자입니다. 대충 S/PDIF 규격이 지원하는 범위 내에서는 잘 돌아갑니다. 2채널 오디오라면 대부분의 경우 신경 안 쓰고 보낼 수 있고요, 비트스트림은 AC3과 DTS코덱까지만 지원합니다. 플레이스테이션이나 Xbox같은 기기들은 내부적으로 Dolby digital live 기능이 있는 칩이 박혀 있으니 그렇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DTS가 AC3보다는 비트레이트가 좀 더 높습니다.) 하지만 PC에서는 DDL 기능이 있는 사운드 카드를 사용하시거나 게임 같은 거에서 다채널은 포기하셔야 합니다. AC3filters 같은 걸 이용한 흑마법이 있기는 한데 사람이 쓸 게 못 됩니다. 그런 거 구축할 시간이면 사운드 카드를 사고 말죠.

아날로그 단자의 품질은 좋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헤드폰은 헤드폰 본체에 DAC가 달려 있습니다. 단자를 꼽는 부분은 엄밀히 말하면 헤드폰이 아니라 소니의 표현으로는 “디지털 서라운드 프로세서” 입니다. 디지털 신호를 받아다가 디지털로 헤드폰에 쏴 주고, 헤드폰에서 D-A 변환과 앰프를 작동시키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아날로그 단자로 입력을 넣는다면 PC로부터 시작해서 DAC – ADC – DSP – DAC를 거치게 되어서 상정하지 않은 왜곡이 추가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디지털 서라운드 프로세서”에 장비된 아날로그 입력단의 품질이 그리 좋지는 않다는 것도요. 기본적으로는 화이트 노이즈가 올라오고 소리가 뭉개집니다. 내장사운드에 꼽아서 그런가 싶어서 DAC도 바꿔보고 프리앰프 같은 것도 끼워놨는데도 변하지 않는 거 보니 입력단의 한계가 있는가 봅니다.

그래서 저번에 헤드폰을 터친 주범인 뮤질랜드를 꺼내 와서 DDC로 동작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끼워 놔서 USB 입력을 받아서 S/PDIF로 변환시키고 끼워놓았습니다. 광케이블 특성 상 접어놓을 수 없어서 정리가 좀 힘든 것만 빼고 말이죠.

대충 이 상태에서 들어 보면 디지털 입력을 받았을 때는 크게 나쁘진 않습니다. 다만 좋지도 않은 정도입니다. 헤드폰 내장 DAC에 물량을 잔뜩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리고 어차피 DSP로 잔뜩 왜곡을 줄 목적에서 쓰는 물건이니) 나쁘지 않을 정도만 되어도 큰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입력단에 대한 설명을 했으니 다음은 이 헤드폰을 쓰는 이유겠죠. 무선 헤드폰은 널려 있고 단순히 편하고자 하면 블루투스를 쓰면 됩니다. 돌비 디멘션 같은 제품을 쓰는 거죠. 이 친구도 좀 더 뒷 세대의 음장과 헤드트래킹에 ANC까지 지원하는 물건이니까요. 하지만 이 헤드폰을 굳이 산다면

1. 휴대용이 아닌 거치용을 전제로 사용한다.

2. 2채널 입력이 아닌 다채널 입력을 받거나 다채널로 확장해서 듣고 싶다

3. 아무튼 잘 모르겠고 소니가 좋다

정도가 될 겁니다.

일단 이 헤드폰은 기본적으로는 2채널 모드로 작동합니다. DD나 DTS를 집어넣는다면 음장을 켜주는 것 같긴 합니다만 2채널 입력이 들어오면 그냥 평소의 헤드폰과 같이 동작합니다. 그리고 오디오적인 평가는 이 상태일 때 제일 좋습니다. MDR-1A같은 친구나 디렘 같은 친구보다 중저음이 좀 더 적게 나고 살짝 풀어진 소리가 납니다. 제 취향은 아닙니다만 일반적으로 쓰기에 나쁘진 않습니다. 이 상태라면 음악을 틀어놔도 그렇게 거슬리지는 않거든요.

여기서부터는 음장을 킨 상태로 설명합니다. 소니 VPT라고 하는 게 들어가 있는데 엑스페리아 폰이나 워크맨을 쓰셨던 분이면 보셨던 적이 있을 겁니다. 대충 이것도 한 20년된 기술이긴 합니다만 그동안 마이너 업데이트라도 거쳤나 봅니다. 이 물건은 기본적으로는 2채널 입력을 받거나, 5.1채널 입력을 받는 모드로 동작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돌비 프로로직 2X 라는 채널 업스케일러를 키면 7.1채널로 찢어줍니다. 광고에서 7.1채널 헤드폰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업스케일러를 킨 상태에서 설명하는 겁니다. 당연히 독립적인 채널로 동작하지는 않고 프론트에서 조금, 서라운드에서 조금 하는 식으로 신호를 생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벽하진 않습니다. 요즘 나오는 DTS 뉴럴 X같은 물건보다는 훨씬 전세대의 물건이거든요. 다만 정위감보다는 음장감을 형성하는 쪽에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근데 그건 AV리시버같은데 끼워 놓고 스피커 채널 수가 맞춰진 상태에서의 평가고요. 여기서는 좀 다릅니다. 2채널 입력을 받는 상태에서는음장을 켜도 머리에 갇힌 느낌이 나기 때문에 어질어질한 2채널 같은 소리가 납니다. 하지만 여기서 업스케일러를 켜서 7.1채널로 찢어놓으면 현실 홈시어터의 프론트 채널처럼 좀 앞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들어줄 만한 소리가 됩니다. 그래서 엔간히 뭘 보는 용도로 쓴다면 업스케일링은 키는 게 좋습니다.

다음은 DRC인데, 이건 상황에 따라 좀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듣거나 보는 물건들은 사전에 어느 정도 컴프레싱이 되어 있기 때문에 킨다면 볼륨이 들쭉날쭉한 상황에 놓이게 되고, 후술할 이 헤드폰의 강렬한 저음을 즐기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다이나믹 레인지가 좀 큰 물건이라면 쓸 수 있겠죠. 이건 직접 쓰셔야 알법한 거기 때문에 더 이상 뭔 말을 하진 못하겠습니다.

여기까지 대충 정리를 해 놨으니 음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봅시다. AV 커뮤니티에서 이 헤드폰을 추천하는 주된 이유는 서브우퍼 효과가 나는 헤드폰이라서입니다. 보통 헤드폰은 저음을 아무리 올려도 서브우퍼처럼 가슴이 웅장해지는 저음을 내주진 않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저음 성분 중 상당수는 소리가 아니라 진동이거든요. 하지만 이 물건은 신기하게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저음을 내 줍니다.

이런 EDM같은 걸 듣거나 영화의 폭발신 같은 저음 성분이 많은 걸 듣다보면 헤드폰에서 저음이 나는 게 아니라 헤드폰 자체가 떨어서 머리를 때립니다. 이런 효과를 내려고 바이브레이터나 골전도 드라이버를 내장한 헤드폰들이 게임용으로 팔리는데, 이 물건은 그런 거 없이 이런 효과가 나는게 참 특이합니다. 마치 저음을 이빠이 키워놓은 다음에 그걸 흡음해서 진동으로 바꿔버리는 것도 아니고 뭔가 신기한 원리로 진동이 나는 거 같은데 이걸 뜯어본 사람이 없으니 참 오묘하기만 합니다. 제 걸 뜯어볼 수도 없고 말이죠.

하지만 이걸 내기 위해서 지불한 대가는 좀 큽니다.

우선 (아마도 이걸 주력으로 쓰라고 내놓은 것 같은) 시네마 모드를 키면 저음의 양이 많이 올라서 가슴이 쉽게 웅장해집니다. 생각보다 주로 사용되는 주파수 대역이 잘 표현되어서 저음이 웅장해짐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다른 대역이 망하진 않습니다만 음악과 같이 사용되는 주파수들이 풍부한 걸 듣게 되면 쉽게 문제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니 픽쳐스 엔지니어들이 튜닝했다고 하는 말은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블록버스터 영화같은 걸 틀어놓으면 꽤나 잘 어우러지고, 음장감이 풍부해집니다. 이 상태로는 나쁘지 않습니다만 러브 코미디 애니메이션이나, 조용한 BGM과 함께 하는 영화같은거는 안 어울립니다. 그냥 오디오테크니카와 돌비 음장을 사세요.

게임 모드는 시네마 모드보다는 중저음의 양이 많이 적습니다. 음장을 안 킨 거랑 비슷한 느낌으로 납니다만 이 경우에는 음장보다는 음상을 살리기 위해서 튜닝을 한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위화감이 느껴지는 사운드로 바뀝니다만 주파수 대역에서 손해를 그다지 보진 않고요 전체적으로 구분이 잘 되는 소리가 납니다. 하지만 이 모드에서 BGM을 틀게 되거나 보이스 채팅을 키게 된다면 시네마 모드의 그것보다 더한 위화감을 느끼게 되니 그 점은 유의하셔야 됩니다.

스포츠 모드는 리어 쪽에 더 튜닝을 한 소리가 나오긴 합니다만 이 모드를 쓸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보이스 모드도 마찬가지입니다. 뉴스 보라고 넣어놓은 모드긴 한데 저는 뉴스까지 헤드폰을 끼고 보진 않거든요. 그리고 뉴스를 보는데 음장이 굳이 필요한지도 모르곘고요. 소리는 마치 보청기 시뮬레이션을 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소리가 납니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이 정도의 느낌입니다. 장단점이 뚜렷하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목적으로 쓸지를 미리 생각하고 구매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확실히 범용으로 쓸법한 물건은 아닙니다.

정리를 하자면 몇 가지 특성으로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기존의 게임용 헤드폰보다는 확실히 쓸만한 소리가 납니다. 게임을 잘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시네마 모드를 키고 분위기를 즐기셔도 무방합니다. 센터 성분을 잘 분리해 주지만, 이 경우에는 DDL이 되는 사운드 카드를 사셔야 합니다.

2. 블록버스터를 주로 본다면 이 헤드폰은 적합합니다.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3. 클럽음악을 틀어놓고 집에서 헤드뱅잉을 하고 싶다면 적합합니다.

4. 러브 코미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신다면 사면 안 됩니다.

5. 아이돌물도 마찬가지입니다.

6. 피아노 BGM같은 건 꿈도 꾸시면 안 됩니다.

7. 이걸로 음악을 들으려는 건 바보짓에 가깝습니다.

8. 영화를 보는 2~3시간 정도는 문제가 없습니다만 그것보다 길어지면 정수리를 압박해서 좀 아픕니다. 전체적으로는 장력보다는 정수리로 지탱하는 느낌의 헤드폰입니다. 무게는 가볍습니다.

https://music.youtube.com/watch?v=_85YqkJnglI&feature=share

아무튼 한 곡 듣고 가시죠(?)


PS : 제조일자가 2018년인 물건이 온 걸 보니 이 제품이 그렇게 잘 팔린 제품이 아니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다는 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PS2 : 자취방에도 점점 DAC들이 옹기종기 모여가는군요.